초록 일부
제1장신라방언의 뿌리 경주방언의 특색
1.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의 말과 문화
대구경북 사람들은 과묵하면서도 과단성이 있다. 그리고 긴 설명을 하지 않고 말을 줄여서 사용하기 때문에 동사문으로 ‘됐나’, ‘됐다’라는 식으로 말을 짧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격조사를 생략하거나 복합동사도 응축하여 말한다. 어찌 보면 경상도 사람들은 관망만 하고 있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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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신라방언의 뿌리 경주방언의 특색
1.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의 말과 문화
대구경북 사람들은 과묵하면서도 과단성이 있다. 그리고 긴 설명을 하지 않고 말을 줄여서 사용하기 때문에 동사문으로 ‘됐나’, ‘됐다’라는 식으로 말을 짧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격조사를 생략하거나 복합동사도 응축하여 말한다. 어찌 보면 경상도 사람들은 관망만 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의사를 결정하며, 그 대신 대단히 강력하게 추진하는 뚝심이 있다. 경상도 남성들은 집에서 ‘밥도’, ‘밥묵자’, ‘자자’ 세 마디 말만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불필요한 말을 잘하지 않는 편이다. 이것은 오랜 경상도 사람들의 기질적인 특징인데 자연 말을 할 때도 입을 크게 벌리거나 오므리지 않고 우물우물 말을 한다. 그렇기에 모음의 숫자도 적고 모음의 상하 간극이나 전후 간극의 차이도 적다.
이처럼 경상도 사람들이 과묵함은 아마도 오랜 이 지역은 문화적인 전통성과 매우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것 같다. 조선조 북인, 남인계가 중심을 이루는 이 지역의 사대부층 사람들은 남자는 말이 적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그러한 훈도를 한 결과가 아닐까? 당쟁이나 사화에 연루된 모든 일이 말이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살갑지 못하고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들이라고 해서 어찌 인간적인 정까지 없을 수야 있겠는가? 깊이 흐르는 물이 멀리 흐르듯이 야들야들하게 호들갑을 떨지는 않지만 한번 맺은 정은 오래 길게 가는 이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역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말씨를 방언, 지역어, 사투리, 탯말 등 다양하게 불린다. 변두리의 말씨는 고어가 많이 남아 있어서 우리말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경주방언은 고대 신라의 언어를 물려 받은 지역이라는 측면에서 고어가 잔존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뿐만 아니라 변두리 사람들의 오랜 생활 속에 축적해 온 가치 있는 지식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도 매우 많이 있다. 가령 ‘부추’의 전라도 사투리인 ‘솔’은 고대 백제 지역으로 유입해 온 예족(濊族)의 언어 흔적이다. 함경도 북부 지역에서 만주 벌판에 퍼져 있던 건주 여진인들의 말 속에 [sor]은 채소를 뜻하는데 바로 이 여진 외래어가 부추를 ‘솔’이라고 했던 그 흔적이다. 말의 원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민족의 이동을 추정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 사례이다.
경상도 사람들의 핏줄기 속에는 유목민의 DNA가 잠복해 있다. 태백준령을 중심으로 동쪽 편에 고대 암각화가 편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영남의 선주민은 튀르크에서 몽고와 만주를 거쳐 밀려들어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날쌘 말을 타고 달리던 그들은 철기문화를 유입했던 선주민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농경문화에 정착되어 오랜 세월을 거쳤지만 아직 펄펄 끓는 이동성의 본성이 경주인들의 결단력과 그들의 행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번 선택한 일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 결코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1900년 1월 9일 자 「황성신문」 논설 “말을 잘 다듬어 쓰자”라는 글을 잠깐 읽어보자.
“기내(경기도) 말씨는 천속하고 관동(강원도) 말씨는 순박하며 영남 말씨는 강직하다. 또 호서(충청도) 말씨는 외식이 많고 호남(전라도) 말씨는 내교가 많다. 그리고 해서(황해도) 말씨는 조금 화려하고 관서(평안도) 말씨는 강한하며 관북 말씨는 지나치게 무겁다.”
20세기 초 황성신문의 기자의 눈에 비친 8도 지역 방언에 대한 평가를 보면 차별적이지 않고 비교적 공정하다. “영남의 말씨는 강직하다.” 그만큼 단호하게도 느껴지지만 군더더기는 다 생략하고 할 말만 아주 짧게 말을 하니 자연 무뚝뚝하게 보일 뿐이다. 그 깊이를 알게 되면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2. 경주방언의 특징
경주방언(이하 경주방언이라 칭한다)은 조선 선조 이후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아오면서 대구를 중심으로 ‘대구-김천’, ‘대구-안동’, ‘대구-경주·포항’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독특한 방언을 형성하고 있으나 크게는 ‘대구-경주’ 방언권에 속한다.
경주방언의 특징으로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고대 신라시대의 고형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점이다. 고대 신라어의 언어 유산을 상당수 보존하고 있다. 어중자음 ‘-g(ㄱ)-’(얼개미, 골갱이), ‘-b(ㅸ)-’(호불애비, 자불다), ‘-z(ㅿ)-’(잇사라, 부직)의 유지형이 많이 남아 있다. 부사형 ‘-아/어(묵-아, 접-아, 죽-아)’는 신라시대의 ‘-良(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경주·포항지역에는 아직 남아 있으나 대구방언에서는 새로운 개신형인 ‘-아/어’가 모음조화형으로 반영되고 있는데 대구가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개신형의 변화를 입은 흔적이다.
둘째, 경주방언의 운소는 중부방언과 경남방언의 중간 형태로 고저의 액센트와 음장(말(馬H)-말:(言L:)-말(斗L))의 대립을 유지하고 있으나 최근 음장의 변별성이 점차 약해져 가고 있다. 특히 한자음에서 ‘개:성(個性)-개성(開成)’처럼 음장의 구분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
셋째, 음운체계로서 모음체계는 대체로 5개의 단모음(/i/, /a/, /?/, /?/, /o/, /u/)체계이며 자음 체계는 /s/:/s'/가 중화되어 변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음운 변화로는 ‘ㄱ-구개음화’, ‘움라우트’, ‘전부모음화’, ‘원순모음화’, ‘어중된소리화’의 강화 등의 변화를 경험했다. 그러나 경주지역의 반촌과 민촌의 언어 차이는 뚜렷하다. 반촌 사람들은 ‘ㄱ-구개음화’(길」질, 기둥」지둥, 한길」한질)과 같은 구개음화형을 잘 받아드리지 않는다. 이는 한자와 한음의 교육의 결과로 보이며 민반촌의 차별화를 고집한 결과라 보인다. 그리고 경기나 충청지방에서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 향촌을 중심으로 동계의 결사조직이 강화되었는데 이 영남 지역에서는 상계와 하계를 결속한 대동계의 결사조직은 느슨한 대신 족계나 화수계 형식의 종족집단의 결사체가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서도 그들의 신분적 권위를 언어로 통해 구별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다.
넷째, 문법체계에서도 높임법의 체계가 ‘하이소’, ‘하소’, ‘하게’, ‘해라’체계로 ‘아주높임-높임-낮춤’의 대립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장형 사피동법도 ‘-게+#하다’체계와 함께 ‘-구로+#하다’와 같은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단형 사동에서도 접사의 중복형이나 ‘-구’계열(발쿠다, 널구다)이 많이 나타나며, 미래시상은 ‘모르겠다/몰시더’, ‘가겠습니다/갈라니이더’와 같이 ‘-겠-’보다는 ‘-리-’계열이 많이 나타나며 아직까지 고대 신라어의 ‘-?-’가 청자높임법으로 사용되는 등 문법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보수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섯째, 어휘체계의 특질로는 한자 어휘가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부사어가 매우 발달되었다. 예를 들어 표준어로 ‘매우, 아주, 몹시, 너무’와 같은 부사어에 대응되는 경주방언의 부사로는 ‘억수로, 한거석, 허들시리, 천지삐가리, 몽창시리, 샜다, 샜삐가리, 한발띠, 대길로, 대빵으로’와 같이 다양한 어휘들이 나타난다. 음식용어에 있어서도 가운데 칼로 요리하는 방법이 ‘오리다, 도리다, 삐지다, 썰다, 깎다’ 등 40여 가지가 넘게 어휘가 분화되어 있다.
또한 독특한 어휘 체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예로는 ‘뜨신물-찬물’, ‘뜨신밥-찬밥’과 같이 감각온도 계열의 체계가 ‘더운물-찬물(*추운물)’, ‘더운밥-찬밥(*추운밥)’과 같은 표준어와 달리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날자 계열의 대립체계도 ‘(과거, 엣날)-아래-어제-오늘-내일-모래-저모래-(후제)’와 같이 ‘오늘’을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어휘 분화가 중부방언에 비해 단촐하다. 단어 파생형도 ‘높이-*낮이, 깊이-*얕이, 넓이-*좁이’와 같이 양극성 대립의 파생형이 양극 계열의 조어력이 음극 계열의 조어형보다 활발하다는 점에서 경주방언의 화자들이 매우 긍정적인 사고와 간결한 어휘체계가 발달된 점을 고려하면 지역 사람들의 특성이 언어에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경주방언은 고대 신라방언의 중심인 경주방언권과 조선조 경주와 경주로 연결되는 방언의 핵을 형성한 결과로 고대어나 중세어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인접 방언의 개신파의 영향도 많이 남아 있다. --- 본문 중에서
[예스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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