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일러두기 = 2
총론 = 11

1장. 모던 경성 태동기, 개화기(~1910년대)

해설 = 23

01 (시) 최남선, 「漢陽歌一節」= 31
『소년』, 1908.12.

02 (소설) 전영택, 「惠善의死」= 32
『창조』, 1919.2.

03 (광고) 「부인다옥」= 59
≪매일신보≫, 1911.6.7

04 (기사) 「動物園完了」= 60
≪황성신문≫, 1909.3.21.

05 (기사) 「공진회와기ᄉᆡᆼ: 광교기ᄉᆡᆼ, 다동기ᄉᆡᆼ, 시곡기ᄉᆡᆼ, 연예관」= 61
≪매일신보≫, 1915.9.10.

06 (사진) 「긴담ᄇᆡ피문사ᄅᆞᆷ」= 66
≪매일신보≫, 1913.9.23.

07 (기사) 「好適ᄒᆞᆫ水泳塲」= 67
≪매일신보≫, 1915.7.16.

08 (기사) 「厥技極巧, 고등녀학교뎐람회ᄂᆞᆫ젼에업던대셩황으로 = 68
ᄂᆡ외국안이모다칭찬」
≪매일신보≫, 1914.11.9.

09 (사진) 「시구의ᄀᆡ졍으로인ᄒᆞ야엽흐로이샤ᄒᆞ랴ᄂᆞᆫ죵로인뎡달린보신각」= 70
≪매일신보≫, 1915.6.15.

10 (사진) 「『京釜線漢江橋梁竣工紀念寫眞帖』(1914) 앞표지」= 71
서울역사박물관, 1914.

11 (사진) 「요사이의문밧경치 동대문밧」= 72
≪매일신보≫, 1916.9.6.

12 (사진) 「서울 전경(환구단)(1910)」= 73
서울역사박물관, 1910.

13 (사진) 「京城寫眞館(『京城繁昌記』, 博文社, 1915)」= 74
서울역사박물관, 1915.


2장. 사상과 분열의 시대, 모던 경성 형성기(1920년대)

해설 = 77

01 (시) 박팔양, 「南大門」= 83
『동광』, 1927.1.

02 (시) 임화, 「네 거리의 順伊」= 85/88
『조선지광』, 1929.1.
『현해탄』, 1936.

03 (기사) 「라혜석, 김우영 공개청첩장」= 91
≪동아일보≫, 1920.4.10.

04 (기사) 「歡迎밧는 朝鮮人 電話交換手」= 92
≪동아일보≫, 1920.4.12.

05 (기사) 「京城市民大運動會」= 94
≪동아일보≫, 1920.5.3.

06 (기사) 「여자학교의원조 리화학당창립삼십오주년긔념식」= 100
≪동아일보≫, 1920.5.30.

07 (기사) 「ᄉᆡ로 되ᄂᆞᆫ ᄲᅡᆯ내터」= 103
≪매일신보≫, 1924.4.3.

08 (기사) 「백남『푸로덕숀』의처녀작『심청』조선극장에상연즁」= 104
≪조선일보≫, 1925.4.1.

09 (기사) 「한강漢江의 스케트대회大會」= 106
≪시대일보≫, 1926.1.18.

10 (기사) 「羅蕙錫女史 世界漫遊 二十二日京城驛出發」= 107
≪조선일보≫, 1927.6.21.

11 (기사) 「崔承喜壤의 舞踊을보고」= 109
≪동아일보≫, 1927.10.28.

12 (사진) 「광화문 전화분국 」(1922) = 113
『조선』, 조선총독부, 1925.

13 (만평) 안석주, 「가상소견 1-5」= 114
≪조선일보≫, 1928.2.5~13.

14 (품평·논평) 최학송, 「모-던껄, 모-던뽀이 대논평」= 124
『별건곤』, 1927.12.20.

15 (품평·논평) 정수일, 「진고개, 서울맛·서울情調」= 129
『별건곤』, 1929.9.27.

16 (잡문) 城西學人, 「서울의 녀름」= 134
『개벽』, 1923.8.1.

17 (기타) 홍사용, 「백조시대(白潮時代)에 남긴 여화(餘話)」= 139
『조광』 제2권 9호, 1936.9.


3장. 모더니즘의 꽃 - 여행 소비 모더니즘(1930년대)

해설= 181

01 (시) 오장환, 「수부(首府)」 = 185
『낭만』, 1936.

02 (시) 이용악, 「다방」= 193
《조선중앙일보》, 1936.1.17.

03 (소설) 이상, 「날개」= 195
『조광』, 1936.

04 (수필) 김남천, 「街路」= 226
《조선일보》, 1938.5.10.

05 (수필) 백석, 「마포」= 229
『조광』, 1935.11.

06 (수필) 이서구, 「애인 다리고 갈 사랑의 <하이킹 코스>」= 232
『삼천리』, 1936.

07 (수필)이헌구 「文人이본서울―ᄭᅩᆺ업는 서울」= 241
《조선일보》 1928.10.12.

08 (수필)최정희, 「다방 거리의 피난처」= 245
《조선일보》, 1933.10.6.

09 (수필)박길룡, 「大京城삘딩 建築評」= 248
『삼천리』, 1935.10.1.

10 (수필) 「서울 株式界 成功者, 사변난 이후 누구누구가 수낫든고」= 256
『삼천리』, 1937.10.1.

11 (수필) 「환락의 서울, 新裝한 사교장 白馬를 차저!」= 261
『삼천리』, 1937.5.1.

12 (기사) 「부민관 준공(府民館竣工)」= 263
《동아일보》, 1935.12.8.

13 (사진) 「대경성안내지도」= 264
1932.6.5.

14 (품평·논평)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 265
『삼천리』, 1927.1.1.

15 (품평·논평) 이서구, 「實査 1年間 大京城 暗黑街 從軍記, 카페·마작·연극· 밤에 피는 꼿」= 270
『별건곤』, 1932.1.1.

16 (품평·논평) 「가을거리의 男女風景」= 279
『별건곤』, 1930.11.1.


4장. 해방과 전후 서울

해설 = 297

01 (시) 오장환, 「병든 서울」= 303
『병든서울』, 정음사, 1946.

02 (시) 이용악, 「우리의 거리」 = 309
『이용악집』, 동지사, 1949.

03 (시) 이육사, 「서울」= 310
『문장』, 1941.4.

04 (수필) 윤동주, 「종시(終始)」= 312
미발표작, 1941.

05 (수필) 박인환, 「서울역에서 남대문까지」= 320
『신태양』, 1952.11.

06 (수필) 노천명, 「서울 체류기」= 323
『나의 생활백서』, 대조사, 1954.

07 (수필) 조병화, 「明洞 시절」= 326
『한국문단이면사』, 깊은샘, 1983.

08 (기사) 「창경원동식물원 부활, 창덕궁 국립박물관도 수리 착수」= 362
《자유신문》, 1947.9.25.

09 (기사) 「쓰는것과呼稱을統一 二重式서울市名의矛盾업세라」= 364
《자유신문》, 1945.11.18.

10 (기사) 「씩씩한新建設의巨步 ② 서울市의神經中樞」= 366
《조선일보》, 1945.11.24.

11 (기사) 「活氣를띈百貨店의賣場」= 368
《조선일보》, 1945.12.1.

12 (기사) 「“特別自由市”로“昇格하는 東洋屈指의 “國都서울”」= 370
《동아일보》, 1946.11.21.

13 (기사) 「朝鮮文學家同盟 서울支部 結成準備」= 371
《현대일보》, 1946.8.4.

14 (기사) 「흥성대는 양키시장」= 372
《동아일보》, 1955.5.16.

15 (기사) 「서울시의 지역별 전쟁 피해 현황」= 376
《동아일보》, 1951.3.16.

16 (기사) 「전쟁이면의 사회상」= 378
《경향신문》, 1952.5.27.

17 (기사) 「서울의 축소판 명동의 하루」= 381
《동아일보》, 1957.11.25.

18 (기사) 「새로운 여름철 의상」= 386
《조선일보》, 1957.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