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리말 : “보도지침 사건이 뭐예요” ․ 5

제1장 개화기의 언론 ① 1883~1897년 ․ 17
『한성순보』이전의 언론 활동 | 근대의 시발점이 된 1876년 강화도조약 |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등장 |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갈등 | 1883년 『한성순보』의 창간 | 『한성순보』의 보도 내용과 성향 | 1884년 갑신정변과 『한성순보』의 폐간 | 1886년 『한성주보』의 창간 | 전신 매체의 도입과 개신교의 선교 활동 |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 1895년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 1896년 『독립신문』의 창간 | 『독립신문』의 노선과 성향 | 『독립신문』의 독자와 광고

제2장 개화기의 언론 ② 1897~1910년 ․ 49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활동 | 1898년 최초의 일간지 『일신문』 창간 | 『제국신문』과 이승만의 언론 활동 | 유생·양반 계층을 겨냥한 『황성신문』의 창간 | 『시사총보』·『상무총보』와 개신교 신문의 창간 | 전화, 유성기, 전차, 영화, 기차의 등장 | 1904년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 1905년 을사늑약과 「시일야방성대곡」| 1906년 『국민신보』·『만세보』·『경향신문』의 창간 | 『대한매일신보』의 반일 민족주의 | 1907년 광무신문지법과 일제의 언론 탄압 | 『대한매일신보』와 국채보상운동 | 『소년』과 『대한민보』의 창간 | 일제의 강점과 신문들의 폐간

제3장 일제강점기의 언론 ① 1910~1929년 ․ 83
일제의 ‘무단정치’와 분할통치 전략 | ‘무단정치 시대’의 신문 | 수탈의 통로로 건설된 철도와 신작로 | 무성영화와 연쇄극의 인기 | 3·1운동과 지하신문의 활약 | 일제의 ‘문화 통치’와 친일파 육성 공작 | 일제가 신문 발행을 허가한 이유 | 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시사신문』의 창간 | 『개벽』·『창조』·『폐허』·『백조』의 창간 | ‘청년 신문’ 『동아일보』의 혈기 왕성 | 『동아일보』의 ‘상업주의’와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 파동 | 『조선일보』의 ‘비판의 상품화’ | 1920년대 중반의 사회주의 열풍 | 최남선의 『시대일보』창간과 좌절 | 이상협의 『중외일보』창간 | 언론 단체의 활동과 기자단의 결성 | 한국 최초의 여기자 이각경·최은희 | 조선일보사의 라디오 실험 방송 | 1927년 경성방송국의 개국 | 무성영화의 인기와 나운규의 <아리랑> | 1920년대의 소비 대중문화 | 1920년대의 기차·자동차 문화

제4장 일제강점기의 언론 ② 1929~1945년 ․ 129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언론 탄압 | 1931년 만보산 사건과 중일전쟁 | 『동아일보』·『조선일보』의 한글 보급 운동 | 1933년 방응모의 『조선일보』인수 | 『조선일보』·『동아일보』의 격렬한 지상 비방전 | 일본 광고주들을 위한 ‘기생 관광’ |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속보·잡지 경쟁 | 신문에 대한 사회적 인식 | 신문의 문학 지배 |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 | 황국신민화 운동과 『조선일보』·『동아일보』의 굴종 |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지원병제 홍보 | 창씨개명과 『동아일보』·『조선일보』의 폐간 | 『동아일보』·『조선일보』의 폐간 이유 | 조선일보사의 『조광』을 통한 활동 | 『매일신보』와『경성일보』의 번영 | 1930년대의 라디오방송 | 1942년 ‘단파방송 밀청 사건’과 전화의 인기 | 영화의 인기와 전쟁 프로파간다 도구화 | 백화점과 소비문화 | 대중가요의 인기와 춤바람

제5장 미군정기의 언론 1945~1948년 ․ 175
“언론의 둑은 터졌다” | ‘엄정 중립은 기회주의적 이념’ |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속간 | ‘찬·반탁’ 논쟁과 『동아일보』| ‘매국신문’ 대 ‘반동신문’의 대결 | ‘좌익 우세’를 저지하기 위한 언론통제 | ‘출판의 둑’도 터졌다 | “좌우(左右)는 싸움으로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 | 라디오의 ‘정당 방송’과 ‘전파 주권’ 획득 | 연극·악극·영화·방송에서의 이념 투쟁 | 쫓고 쫓기는 ‘신문 전쟁’ | 제주 4·3항쟁과 5·10 단독 총선거 | 연설 커뮤니케이션의 호황 | 미군정의 ‘엄청난 물량전’ 공보 활동

제6장 이승만 정권기의 언론 1948~1960년 ․ 207
좌익지의 소멸, 우익지의 번성 | 6·25전쟁과 신문들의 시련 | 6·25 종군 기자들의 어려움 | 만화·문학·영화·가요의 참전 | 신문은 이권을 챙길 수 있는 권력기관 | 1954년 『한국일보』의 창간, 기독교방송의 개국 | 1955년 『대구매일신문』테러 사건 | 신문의 오식(誤植)에 대한 졸렬한 대응 | 『사상계』·『학원』의 창간과『자유부인』 | 반공 영화와 미국 지향적 가요 | “『동아일보』를 보면 재미없다” | 1956년 한국 최초의 TV 방송과 AFKN TV | 라디오와 아나운서의 인기 | 영화 <자유부인>과 ‘고무신 관객’ | 1957년 관훈클럽과 ‘신문의 날’ 탄생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와 『사상계』의 활약 |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 | 신문의 정론성과 상업성 | 4·19혁명과 김주열의 시체 사진

제7장 장면 정권기의 언론 1960~1961년 ․ 249
10배 가까이 늘어난 신문 | 사이비 기자의 발호와 독자들의 ‘실력 행사’ | “누가 더 비판을 잘하나” 경쟁 | ‘신문 망국론’의 등장 | 『민족일보』와 장면 정부의 충돌 | 4·19 1주년의 ‘통분·치욕·울분’ |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

제8장 박정희 정권기의 언론 ① 1961~1970년 ․ 265
5·16군사쿠데타와 신문의 지지 | 장준하의 5·16군사쿠데타 지지 | 『민족일보』조용수 사형 | KBS TV 개국과 ‘TV 열풍’ | 부패 언론인 단속과 단간제 실시 | “주여! 상업방송을 금지시켜 주시옵소서” | 1964년 한일회담과 6·3 사태 |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과 언론의 굴복 | 삼성의 ‘동양 TV’ 개국과 『중앙일보』 창간 | 라디오의 ‘DJ 전성시대’와 코미디 경쟁 | 영화 <맨발의 청춘>과 <저 하늘에도 슬픔이> | 1966년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 | 『경향신문』경매, 기자 테러 | 『동아일보』50만 부 돌파, ‘신민당 소명서’ 사건 | ‘서울 공화국’ 체제의 가요와 스크린쿼터제 | “신문은 편집인 손에서 떠났다” | 언론에 대한 특혜와 언론의 상업적 성장 | 기자의 빈곤·촌지·전직 | 주간지의 번성과 『선데이서울』의 인기 | 재벌의 언론계 영향력 증대 | 1969년은 한국 영화의 최전성기 | TV 안테나는 ‘번영과 문명화’의 상징

제9장 박정희 정권기의 언론 ② 1970~1979년 ․ 315
1970년 김지하의 「오적(五賊)」| 『다리』 탄압 사건 | 대학생들의 ‘언론화형선언문’ |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 |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데스크> 탄생 | 박정희의 특명에 따른 MBC 민간 분양 | 프레스카드제와 언론 통폐합 | ‘10월 유신’과 언론의 관제화 | ‘유신방송법’과 한국방송공사의 탄생 | 언론인의 정관계 진출 | <여로>·<님과 함께>·‘통블생’·<별들의 고향> | ‘오일 쇼크’와 여권 매체 계열화 | 『동아일보』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 『조선일보』에서 내쫓긴 32명의 기자 | 『동아일보』에서 내쫓긴 113명의 기자 | 해직 기자들의 수난과 고통 | 베트남 패망, 헌법 논의를 금지한 긴급조치 9호 | 대중문화계를 강타한 박정희 정권의 히스테리 | 신문과 TV의 광고 쟁탈 갈등 | ‘하이틴 영화’·‘호스티스 영화’·‘대학가요제’| 『우상과 이성』·『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 일지’ 사건 | 신문들의 판매 전쟁과 독과점화

제10장 전두환 정권기의 언론 1979~1988년 ․ 365
신군부의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 공작 | 다시 일어난 ‘자유언론실천운동’ | 5·18광주항쟁과 ‘관객의 부재’ | 언론의 5·18 왜곡·허위 보도 | 신군부의 민주 언론인 제거 공작 | ‘공포 분위기’로 강행한 언론 통폐합 | 언론 통폐합의 7대 효과 | 컬러 TV 방송 실시 | 언론기본법 제정과 공익자금 조성 | 신문의 산업적 호황과『조선일보』의 번영 | 야만의 극치를 보인 ‘한수산 필화 사건’ | 1982년 통금 해제와 <애마부인> | 프로야구의 출범과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 KAL기 실종과 ‘땡전 뉴스’ | ‘보도지침’ 폭로 사건 | TV 시청료 거부 운동 | 1986년 ‘평화의 댐’ 사건 | 박종철과 이한열, 그리고 6월 항쟁 | 1987년 언론기본법 폐지와 언론노조 결성

제11장 노태우 정권기의 언론 1988~1993년 ․ 407
1988년 『한겨레신문』의 창간 | 서울올림픽과 대중매체의 호황 | 자유화의 물결, 사이비 언론의 창궐 | <어머니의 노래>·<광주는 말한다> | 신문들의 증면·CTS 경쟁 | UIP 영화 직배 반대 투쟁 | 복합극장의 등장, 국산 영화 점유율 20퍼센트 | 1990년 4월 KBS 사태 | 방송법 국회 날치기 통과 | 1991년 수서 사건과 언론 부패 | 언론의 촌지·향응 잔치 | <땅>·<여명의 눈동자>·<사랑이 뭐길래> | 신문의 엔터테인먼트 상품화 | ‘권력과의 싸움’에서 ‘자본과의 싸움’으로 | SBS 라디오·TV 개국 | 1992년 SBS의 반란 | ‘서태지와 아이들’과 <질투> | ‘김영삼 장학생’ 논란

제12장 김영삼 정권기의 언론 1993~1998년 ․ 447
김영삼 여론 정치의 명암(明暗)| 신문 전쟁과 ‘생활정보신문’의 번성 | TV 시청률 무한 경쟁과 ‘<서편제> 열풍’ | ‘연예인 신드롬’과 연예 저널리즘 | 1994년 신문·방송의 광고 전쟁 | 신세대·마니아·PC통신 | 차인표·신은경·<모래시계> | 케이블TV·지역 민방·‘땡김 뉴스’ | 1996년 ‘부끄러운 신문 100돌’ | 음반 사전 심의와 영화 사전 검열 위헌 판결 | ‘몸’·‘불륜’·‘섹스’의 재발견 |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대중화

제13장 김대중 정권기의 언론 1998~2003년 ․ 475
‘서바이벌 게임’에 들어선 언론 | 신문을 많이 팔수록 손해 본다 | 언로(言路) 독과점과 언론개혁시민연대의 출범 | 조선일보사가 만든 ‘최장집 사건’| 스크린쿼터제 축소 논란과 ‘<쉬리> 열풍’ | ‘제1권부’로 등극한 언론 | 통합방송법 제정과 홈쇼핑 채널의 인기 | “IMF가 없었다면 한류가 생겨날 수 있었을까” | 인터넷의 급성장과 포털의 등장 | 노래방·비디오방·PC방의 인기 | “한국에선 개나 소나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 | 언론사 세무조사 논란 | ‘2002 월드컵 열풍’의 수혜자는 포털과 노무현

제14장 노무현 정권기의 언론 2003~2008년 ․ 503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 논란 | 노무현 정권과 『오마이뉴스』| 인터넷과 무료신문이 촉발시킨 ‘신문 위기론’ |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방송 논란 | ‘조선·동아는 역사의 반역자’ 논란 | 신문법과 언론피해구제법 제정 | 지상파방송 위기론, ‘손안의 TV’ 시대 개막 | “의원 146명이 당게낭인 12인에 끌려다닌다” | 진보-보수파의 인터넷 장악 전쟁 | ‘조선·동아는 독극물’, 안티조선운동 | 노무현 대통령의 댓글 정치 | ‘포털 논란’과 ‘UCC 열풍’| <괴물>과 ‘1,000만 신드롬’ | ‘언론과의 전쟁’을 무력화시킨 부동산 투기 광풍

제15장 이명박 정권기의 언론 2008~2013년 ․ 529
친(親)이명박 폴리널리스트의 전성시대 | 18대 총선과 ‘진보 정치’의 몰락 | ‘쇠고기 촛불집회’의 온라인 24시간 생중계 | 방송통신위원회의 출범과 KBS 사장 정연주 탄압 | YTN의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 | 미디어법 논란과 ‘미네르바 신드롬’ | 낙하산, YTN 기자 구속, 장자연의 죽음 | 노무현 서거와 ‘죽음의 문화정치학’ | 미디어 관련 3법 날치기 통과 | 방송계 블랙리스트 논란 | 조선·중앙·동아·매경의 종합편성채널 개국 | 방송 노조공동 파업과 ‘방송계 사찰 보고서’ | 4·11 총선에 독(毒)이 된 ‘<나꼼수> 열풍’ | 제18대 대선은 ‘종편과 <나꼼수>’의 싸움

제16장 박근혜 정권기의 언론 2013~2017년 ․ 555
스마트폰 세계 1위, 무료신문의 죽음 | ‘손석희의 JTBC행’과 ‘종편의 역설’ | ‘세월호 참사’와 ‘기레기’의 탄생 | 세월호 ‘보도 통제’와 ‘폴리널리스트’ 논란 | ‘정윤회 국정 개입 보고서’ 파문 | ‘뉴스 어뷰징’과 ‘포털 뉴스 규제론’ | ‘인터넷신문 요건 강화’ 논란 | 방송 통제 ‘당근과 채찍’ 논란 | 기자의 직업윤리와 김영란법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서막을 연 TV조선 | JTBC ‘최순실 태블릿PC’ 특종 보도의 충격 | “드라마보다 뉴스가 더 재미있다” | 조갑제의 ‘조중동은 보수의 배신자’ 선언 | ‘대통령 박근혜 파면’, 1,600만 촛불 집회 종료

제17장 문재인 정권기의 언론 2017~2019년 ․ 581
방송계 ‘적폐 청산’ 갈등 | ‘가짜뉴스’ 논란과 ‘팩트체크’ | ‘가짜뉴스’라는 용어의 혼란 | “포털의 시대가 지고, 유튜브 시대가 오고 있다” | 알릴레오와 홍카콜라가 불붙인 ‘유튜브 혈전’ | ‘알고리즘 독재’로 “IT기업이 ‘신’이 된 세상” | “양치기 소년의 외침으로 끝나지 않을 ‘신문 소멸’” | ‘미투’ 2차 가해를 양산한 언론 보도 | 넷플릭스, 지상파 위기론, 중간광고 논란 | 권언유착 없는 폴리널리스트는 가능한가

맺는말 : ‘기술결정론의 독재’를 넘어서 ․ 604
개화기∼미군정기의 언론 | 이승만 정권∼박정희 정권기의 언론 | 전두환 정권∼노태우 정권기의 언론 | 김영삼 정권∼문재인 정권기의 언론 | 한국은 ‘미디어 사회’ | “민주주의의 위기는 저널리즘의 위기다”

참고문헌 ․ 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