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문 _ 류짜이푸劉再復

제1장 신후이 소년: 량치차오 가계
조부: ‘의리’를 강구하고 ‘절개’를 중시하다 | 조부의 가르침 아래 ‘소년등과 하다’ | 부모: 수신과 구제 | 소년 시절에 청운의 큰 뜻을 품다

제2장 집안 가득 뛰어난 인재: 량치차오와 자녀들
동서양 장점을 융합한 아버지의 자식교육 | 폐부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럽고 순수한 부성애 | 셴얼 쓰순: 량치차오의 유능한 조수 | 쓰청 교육: 학문은 모름지기 흥미를 느껴야 한다 | 량쓰융: 부친의 지지하에 고고학자가 되다 | 량쓰중: 그의 정치 열정이 부친에게 인정을 받다 | 량치차오의 다른 자녀들 | 신민을 길러내다

제3장 서로 존경하고 서로 알아주다: 량치차오의 혼인과 애정
총명하고 강인한 리 부인 | 힘든 일을 감내하며 원망도 두려워하지 않은 왕 부인 | 홍안紅顔의 젊은 지기 허 소저

제4장 서생으로서 나라에 보답하다: 량치차오와 캉유웨이(상)
난하이 성인 캉유웨이 | “사상계의 일대 폭풍” | 재목이 가득했던 만목초당 | 갑오회시 |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그리고 공거상서 | 신정과 「황제에게 올리는 세번째 상소문」 | 『만국공보』 발간 및 강학회 | 스승과 제자가 처음으로 의견이 갈리다 | 보국회의 단명 | 무술유신으로 팔고문을 폐지하다 | 경사대학당과 상하이역서국 | 무술변법은 왜 실패했을까?

제5장 서로 다른 길을 가다: 량치차오와 캉유웨이(하)
일본에 도움을 구하다 | 보황운동 | 새로운 사상과 지식의 유혹을 받다 | ‘새로운’ 국민: 자유 쟁취와 민권 신장 | 『청의보』에서 『신민총보』까지 | 공교 보호의 입장을 버리다 | 캉유웨이의 ‘반혁명’ | 사제 간의 갈등, 관계 악화 | 진화공사 사건으로 보황회가 붕괴되다 | 량치차오와 신해혁명 |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결별

제6장 스승과 벗을 겸하다: 량치차오와 황쭌셴
인경려 주인 황궁두 | 독서냐 구국운동이냐? | 시무학당을 주관하다 | 후난 신정 | 평생 스승과 벗을 겸하다

제7장 간담상조肝膽相照: 량치차오와 탄쓰퉁
프레지던트로 뽑힐 만한 탄쓰퉁 | 사방을 방랑하던 탄쓰퉁의 소년 시절 | 탄쓰퉁: 학문과 사상의 대전환 | 치국 방략: ‘독단적 통치술’을 ‘합의적 통치술’로 바꾸다 | 업무와 독서 두 가지 모두 그르치지 않다 | “후난의 선비는 관직에 등용할 만하다” | 시무학당에서 영재를 기르다 | 민지를 계발한 남학회 | 유신파와 수구파가 물과 불처럼 대립하다 | 무술변법, 백일유신 | 탄쓰퉁의 옥중 마지막 편지, 진짜인가? 가짜인가?

제8장 시대를 알고 사무에 통달하다: 량치차오와 왕캉녠
같은 스승 밑 동문으로 깊은 우의를 맺다 | 함께 『시무보』를 창간하다 | 협력에서 원한으로

제9장 뜨거운 피를 조국에 바치다: 량치차오와 탕차이창
황상이 폐위되다 |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황제 보위 | 류양 지사 | 시무학당에서 우의를 맺다 | 탕차이창과 캉ㆍ량 | 『청의보』: 유신의 목구멍이 되다 | 부상扶桑에서 학교를 열다 | 량치차오: 변화에 뛰어난 호걸 | 경자년 황제 보위勤王를 위한 거사

제10장 근세 영웅의 쌍벽: 량치차오와 쑨중산
쑨중산과 캉유웨이는 왜 친교를 맺을 수 없었을까? | 량치차오가 쑨중산을 흠모하며 연합을 시도하다 | 호놀룰루로 간 후 쑨중산과 물불 같은 관계가 되다

제11장 적이면서 벗: 량치차오와 장타이옌
『시무보』의 두 건필 | 존경심과 적개심 사이 | 무술정변 이후 두 사람의 사상 분열이 가속화하다 | 량치차오의 미국 유람기 | 보황과 입헌 그리고 배만혁명 | 장타이옌이 서재로 물러난 뒤 둘 사이가 점차 멀어지다

제12장 나 홀로 인재를 아끼다: 량치차오와 양두
젊은 기상으로 시무학당에서 재능을 겨루다 | 일본에서 다시 만나 서로가 서로를 아끼다 | 철도 부설권 쟁취와 입헌 참여, 두 사람의 긴밀한 협력 | 신당 성립, 영도권 귀속문제로 의견 차이가 생기다 | 정문사를 설립해 어려운 틈새에서 분투하다 | 양두, 민국의 ‘제사’가 되려는 꿈을 꾸다가 불문으로 은퇴하다

제13장 성공 직전의 실패: 량치차오와 위안스카이
만청 시기의 첫번째 합작 | 위안스카이 타도가 캉과 량의 주요 목표가 되다 | 민국 시기의 재합작 | 량치차오가 재정문제와 정당문제를 이야기하다 | 량치차오의 귀국과 출로

제14장 뜻이 같고 생각도 일치하다: 량치차오와 차이어
량치차오 마음에 쏙 든 애제자, 차이어 | 광시에서 군사훈련을 하며 대사를 도모하다 | 우창봉기에 호응했지만 종족혁명은 주장하지 않다 | 량치차오가 귀국해 국가 건설에 참여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다 | 혁명 성공 후 군대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 윈난 경영에 고심하다 | 량치차오의 건국 방침 | ‘제2차 혁명’이 남긴 화근 | 스승과 제자가 손을 잡고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에 반대하다 | 국가를 위해 싸우고, 인격을 위해 싸우다 | 각 성이 독립하자 우울증과 조급증으로 사망한 위안스카이 | 대세가 안정되었지만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다

제15장 시대의 고난을 함께하다: 량치차오와 장바이리
일본에 유학해 명성을 멀리까지 떨치다 | 학교를 잘 운영하지 못하면 자살하겠다 | 량과 장이 낙담해 함께 정치 소용돌이에 말려들다 |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야 하는가? | 정계를 은퇴하고 함께 유럽을 여행하다 | 5ㆍ4운동 배후의 량치차오 | 유럽여행 인상기 『구유심영록』 | “중국을 위해 약방문을 찾다” | 한 편의 서문이 뜻밖에도 한 권의 저서가 되다 | 문화전파에 진력하다 | 연성자치 및 각 성 입헌

제16장 나이를 잊은 사귐: 량치차오와 딩원장
소년 천재 딩원장 | 영국 유학이라는 모험 | 귀국하여 취업하다 | 지질학 선구자 | 유럽 견학 후 베이징대학과 접촉하다 | 후스와 사귀다 | 지식인의 정치토론 | ‘정신의 기황을 구제하다’ | 과학과 현학 논쟁 | 쑹후 시정독판 | 량치차오가 세상을 떠난 후 딩원장이 뒷일을 처리하다

제17장 앞사람을 잇고 뒷사람을 계도하다: 량치차오와 후스
소년 후스, ‘량 선생에게 무궁한 은혜를 입다’ | 후스와 량치차오는 언제 처음 만났는가? | 학술 논쟁과 기세 싸움 | ‘국학서목’ 논쟁 | 신문화 제창이 꼭 구문화 배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전환기의 길을 연 선봉장

제18장 사제지간의 정의情誼: 량치차오와 쉬즈모
사제지간의 정의 | 재능이 넘치는 쉬즈모 | 린후이인과의 사랑 때문에 장유이와 이혼하다 | 쉬즈모는 왜 눈앞의 박사학위를 포기했나? | 타고르의 중국 방문 | 루샤오만과 사랑을 나누고, 『신보』 부간을 접수하다 | 주례가 신랑을 훈계하다 | 량치차오도 세상을 떠나고, 시인도 천상으로 날아가다

제19장 적막한 량치차오 사후
량치차오에 대한 평가가 사람마다 다르다 | 잦은 변화에도 자신이 세운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은 량치차오 | 적막한 사후 | 량치차오를 새롭게 인식하다

저자 후기 / 옮긴이의 말 / 부록: 중국 근현대 인명 중한 발음 비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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