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최만리 상소문을 해설하는 이유
1부 최만리 상소문에 들어가기 전
한글이 등장하는 첫 번째 기사 해설
한글이 등장하는 두 번째 기사 해설
최만리 상소문에 뜻을 함께 한 7인 중 상소문 작성자로 추정되는 인물
후대에 창작된 역사의 몇 가지 사례
2부 최만리 상소문 내용
서두
전자(篆字)를 모방했다는 세종의 주장에 대한 불신
중화로 문명화한 조선은 한자로 충분
설총의 이두는 야비하지만 학문에 도움 되는 것
공개 당시에는 27자
학문 풍토에 대한 우려
위항이어(委巷俚語)와 호칭 언문의 관계
한글은 한낱 기예(技藝)에 불과한 것
문자와 백성들의 억울함, 그 상관관계
재상들도 까맣게 몰랐던 문자 창제
세종이 직접 한글을 가르쳐 익히도록 했다는 이배(吏輩) 10여 인의 정체
<운회> 번역 사업에 관한 불만
공개 당시의 <예의>를 언급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구
공개 당시에는 <동국정운>식이 아니었다는 증거
어두자음군(語頭子音群)의 실제 발음
쉬운 문자를 어렵게 만든 <해례>
세종의 초수리 약수터 행
세자와 한글
말미
3부 언쟁
상소문에 대한 세종의 반박
세종의 반박에 대한 최만리 등의 재반박
김문, 정창손을 지목한 질책
징계
상소문 파동의 마무리
4부 언문정국을 무탈하게 넘기기 위한 세종의 준비
세종 25년 2월에 출발한 통신사의 소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던 서장관 신숙주의 역할
관인 개량 사업
황희의 사직청원
한글을 처음 가르친 현장의 풍경
한글을 공개한 날의 의정부
한글을 공개한 다음날의 주자소
신인손, 신석조 부자의 엇갈린 행보
최만리의 마지막 소임은 집현전의 정상화
황희의 장수와 한글
세종 27년 4월에 완성된 <용비어천가> 원고가 출간되지 못한 사유
5부 아직도 집현전 학사 창제설이 통하는 까닭
고려 말 사대부들의, 한족 왕조 천자만이 진정한 천자라는 착각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의, 사대주의가 조선 망국의 사유였다는 착각
현대 역사가들의, 조선 전기가 후기보다 더 자주적이었다는 착각
여러 착각이 겹쳐 최만리 상소문보다 집현전 학사 창제설을 더 믿게 된 착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