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프랑스 문학의 전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프랑스의 대표 작가다. 1802년 브장송에서 태어나 나폴레옹 휘하에서 장군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지냈다. 파리로 돌아와 처음에는 파리 이공대학(Ecole Polytechnique)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이미 문학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822년 시집 《오드(Les Odes)》를 출간한 이후로 시작 활동을 계속했다. 1827년 유명한 《크롬웰 서문(Preface de Cromwell)》을 발표해서 낭만주의 문학 이론을 표방하고, 1830년 희곡 《에르나니(Hernani)》의 상연으로 낭만주의 문학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1843년까지 장편소설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de Paris)》(1831)과 《동방시집(Les Orientales)》(1829)을 비롯한 주옥같은 다섯 권의 서정 시집, 그리고 여러 평론과 기행문을 출간했다. 또한 《에르나니》(1830) 외 일곱 편의 희곡을 1843년까지 지속적으로 출판했다.
초기에 그는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는 왕당파였지만 1848년 2월 혁명 이후 입법의회 의원에 선출되면서 민주주의자로 변모했다.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1851년 12월)에 의한 집정에 항거해 국외로 망명했다. 긴 망명 생활은 그의 작품 세계 전체 판도를 규정지을 만큼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풍자 시집 《징벌 시집(Les Chatiments)》(1853)을 시작으로 대표 서정 시집인 《관조 시집》(1856)과 서사 시집인 《세기의 전설》(1859), 사후에 발간된 미완의 주요 시집들인 《사탄의 종말》《신》 등과 더불어 중요한 소설들인 《레 미제라블》(1862) 《바다의 일꾼들》(1866) 《웃는 남자》(1869)를 집필했다. 예술론을 피력한 평론집 《윌리엄 셰익스피어》(1864) 외 수많은 미발표 원고를 남기기도 했다.
1870년 제2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제가 부활된 후에 귀국하여 이듬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가 말년을 보냈던 파리의 엘로 거리는 그의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빅토르 위고 거리’로 개칭되었다. 1885년 5월 22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는데 프랑스 정부는 국장으로 그를 예우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