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8년 3월 20일, 노르웨이 남부 항구도시 시엔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여덟 살 때 집이 파산하여 열다섯 살까지 약방의 도제로 일했다. 급격히 기울어진 가세 탓으로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약제사 조수로 일하며 독학으로 의과 대학에 응시할 뜻을 품고 공부를 시작하는 한편, 이때부터 풍자성을 담은 만화와 시를 신문에 기고했다.
희곡 [카틸리나](1848)를 출판하였으나 주목받지 못하고 그 후 [전사의 무덤](1850)이 극장에 채택되어 상연되자 대학 진학을 단념하고 작가로 나설 것을 결심했다.
1851년부터 노르웨이 국민극장에서 전속작가 겸 무대감독으로 10년 넘게 활동하면서 많은 희곡을 지었으며, 이때 무대 기교를 연구한 것은 이후 그가 극작가로서 작품을 쓰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857년, 서정 비극 [올라프 릴리엑클란스]를 마지막으로 노르웨이 극장의 예술 총무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여성운동가 스잔나 트레젠과 결혼한다. 이때 최초의 현대극 [사랑의 희극](1866)과 [왕위를 노리는 자]를 발표했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그 후 입센은 노르웨이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 그리스 로마의 고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30년간 방황하는 삶을 살다 로마에 정착해서 쓰게 된 목사 브랑을 주인공으로 한 대작 [브랑](1866)을 발표하고 명성을 쌓았다.
그 작품으로 엄청난 호평을 받게 되고, 본국 노르웨이에서 그의 작품 판매량이 급격히 증가한다.
[황제와 갈릴리인]을 출간했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차가웠고, 이때부터 사실주의적 수법을 통한 전환을 시도해 [사회의 기둥](1877), [인형의 집](1879), [유령](1881), [민중의 적](1882), [들오리](1884) 등의 작품을 발표한다.
[페르 귄트](1867), [황제와 갈릴레아 사람](1873) 등에서 사상적 입장을 확고하게 굳혔다. 이어 사회극 [사회의 기둥](1877), [인형의 집](1879) 등을 발표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유령](1881), [민중의 적](1882), [들오리](1884), [로스메르 저택](1866), [바다에서 온 부인](1888), [헤다 가블레르](1890), [건축사 솔네스](1892), [작은 아이욜프][보르크만][우리들 죽은 사람이 눈뜰 때]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