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게네프
오룔주(州) 스파스코예루토비노보에 있는 어머니의 영지(領地)에서 출생. 아버지는 기병 장교로서 방탕과 도박으로 신세를 망치고는, 재산이 탐나서 1,000명의 농노를 거느린,6세나 연상인 부유한 여지주(女地主)와 결혼하였다. 어머니는 추한 용모에다 포악한 전제군주적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아버지와는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투르게네프는 어머니 영지의 농노들에 대한 동정에서 농노제를 증오하게 되었다. 이런 복잡한 가정사정이 한 소년의 비정상적인 첫사랑을 묘사한 중편(中篇) 《첫사랑》(1860)에 그흔적이 엿보인다. 어릴 때부터 외국인 가정교사에게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배웠다. 1833년 모스크바대학 문학부에 입학하고, 다음해 페테르부르크대학 철학부 언어학과로 옮겼다. 1836년 대학을 졸업, 셰익스피어와 바이런의 작품 번역을시도하였고, 푸슈킨과도 교유하였다. 1838∼1841년 베를린대학에서 철학 ·고대어 ·역사를 배우고, 베를린에서 스탄케비치, 그라노프스키, 바쿠닌 등 진보적인 러시아지식인들과 친교를 맺게 되어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1841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수렵을 즐기고, 가을에는 바쿠닌을 찾기도 하였다. 내무부에 근무하면서 발표한 서사시 《파라샤 Parasha》(1843)는 비평가 벨린스키의 격찬을 받았다. 43년 겨울 페테르부르크에 온 프랑스 여가수 P.비아르도와 알게 되어 매일 그녀와 만났고, 그 후 죽을 때까지 그녀와의 친교가 계속되어 그가 생애의 태반을 외국에서 지낸 원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후일 《문학적 회상》(1869)에서 농노제라는‘적’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하여 서유럽에 도피하였다고 술회하였다. 1847년 《동시대인(同時代人)》지(誌) 제1호에 농노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연작 《사냥꾼의 수기(手記) Zapiski okhotnika》의 제1작이 발표되었다. 이에 대한 호평에 자신을 얻어 속편을 파리에서 썼다.
계속하여 소설을 발표하였고, 1850년 말 어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농노를 해방시켰다. 1852년 농노제의 비판으로 당국의 미움을 사, 고골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구실로체포된 후 고향에서 연금생활도 하였다. 이 무렵 농노제에 대한 증오에 찬 단편 《무무 Mumu》를 집필하였고, 1852년 8월에는 《사냥꾼의 수기》가 출판되었는데, 이출판을 허가한 검열관 리보노프는 면직당하였다. 1855년, 뛰어난 지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실 속에서 삶의 목표를 발견하지 못하였던 1830년대 ·1840년대의 ‘잉여인간(剩餘人間)’을 형상화한 장편 《루딘 Rudin》을 발표하여 장편 작가로서의 지반을 굳혔다. 1858년 무렵부터 파리에 살면서 몰락하는 귀족계급에의 엘레지 《귀족의 보금자리 Dvoryanskoe gnezdo》(1859), 농노해방 전야를 배경으로 혁명적인 청년들을 그린 《그 전날 밤 Nakanune》(1860), 니힐리스트 ‘바자로프’를등장시켜 부자(父子) 2대의 사상적 대립을 묘사한 《아버지와 아들 Ottsy i deti》(1862), 망명 혁명가들의 퇴폐를 고발한 《연기 Dym》(1867), 나로드니키의 약점을 찌른 《처녀지 Nov''》(1877) 등과 그 밖에 많은작품을 발표하였고, 1882년에는조국 러시아와 러시아어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산문시(散文詩)》를 발표하였다. 파리교외 비아르도 부인의 별장에서 척추암으로 죽었고, 유언에 따라 페테르부르크의 보르코보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