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소개
임춘(林椿)은 고려 무인 집권기를 살았던 인물로,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다. 그의 출생 및 사망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의종 대에 태어나서 30대 후반 또는 40대까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할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임중간(林仲幹)이며, 그의 아버지는 상서(尙書)를 지낸 임광비(林光庇)였다. 그의 집안은 귀족으로서 상당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큰아버지인 임종비(林宗庇)와 아버지가 문장을 잘 지어야만 될 수 있는 한림원 학사를 지냈고, 작은아버지인 임민비(林民庇)가 지은 글이 [동문선]에 여러 편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집안은 귀족 사회 내에서도 상당한 문장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임종비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리하여 임종비의 학문 세계, 문장을 짓는 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7세에 경서를 통달했다고 할 정도로 신동이었으며, 친구인 이인로가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문장을 잘 짓기로 명성이 났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과거를 통해 입신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이 20세를 전후하여 무신 정변이 발발하면서, 그의 삶은 일대 전환을 맞았다. 무신 정변으로 가문 전체가 화를 입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왔던 공음전(功蔭田)까지 탈취당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했으며, 친지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리하여 그는 개경에서 5년간 은신하다가 가족을 이끌고 영남 지방으로 피신하여 7년간 타향살이를 했다. 이런 도중에도 그는 글을 짓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관료가 되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쓰기도 했다. 다시 개경으로 돌아온 뒤에도 과거에 응시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고, 얼마 뒤 경기도 장단으로 내려가 실의와 곤궁 속에서 방황하다가 요절했다. 이인로·오세재·이담지·조통·황보항·함순과 함께 죽림칠현을 모방한 죽림고회를 만들어 술을 벗하며 문학을 논했고,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위로했다. 문집으로는 [서하집]이 있다. [고승전(高僧傳)]을 편찬했다고 하지만, 현재 전해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