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효[申在孝, 1812(순조 12)∼1884(고종 21)]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출생했다. 오위장(五衛將) 벼슬을 지냈다.
중인(中人)에 천석꾼의 재산을 이룬 사람으로서 생활에 여유가 있고 판소리에 관심과 조예가 깊었으며, 판소리 명창(名唱)들을 후원(後援)해 좋은 명창들을 많이 길러냈다. 뿐만 아니라 전부터 전해오던 판소리 <춘향가(春香歌)>, <심청가(沈淸歌)>, <박타령>, <토별가(兎鼈歌)>, <적벽가(赤壁歌)>, <변강쇠가> 등 여섯 작품을 개작(改作)했다. 그전에 광대들이 만든 거칠고 발랄한 판소리 사설(辭說)을 중인(中人)의 시각에서 좀 더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재구성했다. 이로써 판소리가 상민(常民)들의 예술에서 벗어나 중인(中人) 이상 양반(兩班)도 즐길 수 있는 민족문학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또 판소리의 이론적 체계도 모색해 <광대가(廣大歌)>를 지어서 인물, 사설, 득음(得音), 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했다. 판소리 사설 외에도 30여 편의 단가(短歌) 또는 허두가(虛頭歌)라고 하는 짧은 노래도 지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景福宮)을 중수하고 낙성연(落成宴)을 할 때, <경복궁타령>과 <방아타령> 등을 지어서 제자인 진채선(陳彩仙)에게 부르게 하여,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기도 했다. 이처럼 신재효는 오늘날 판소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한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