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국어의 사상’과 근대 언어학의 정치성
 언어의 문제에서 중세와 구분되는 근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꼽는다면 각 민족국가가 라틴어나 고전 한문과 같은 중세적 보편 문어 대신 자신의 세속어(vernacular)를 글쓰기의 영역에 전면적으로 도입하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베네딕트 앤더슨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민족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앤더슨이 민족국가를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그 단위나 경계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즉,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된다”는 점에서 민족국가는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동질적으로 느끼는 그러한 ‘상상’에 현실적인 감각을 제공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매일 하고 있는 말하기, 글쓰기라는 행위이다. 
물론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동질적인 구성원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온갖 변이와 변종에도 불구하고 민족국가의 구성원들이 모두 ‘하나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상상’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언어학은 바로 그러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담론/제도이다. 실제로 불어학, 독어학, 일본어학, 중국어학, 한국어학과 같이 민족국가 단위로 설정되어 있는 개별 언어학은 그 언어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는 ‘하나의 문법’을 가정한고 그에 입각하여 ‘국어문법’을 기술한다.
도처에서 경험하는 차별과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느끼는 수평적 동료 의식을 설명하는 데는 따라서 각 민족국가의 ‘국어’, 그리고 단일한 ‘국어’라는 그 ‘상상’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여 그 실체를 ‘실증’해 내고야마는 언어학보다 더 중요한 것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 각 민족국가의 ‘국어’를 연구하는 개별 언어학, 즉 ‘국어학’은 (‘국문학’과 ‘국사’가 그렇듯이) 근대 국민국가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국가장치의 하나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근대언어학으로서의 ‘국어학’의 기본 가정이나 전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으로서 국내 학계에서 이러한 시도는 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적 글쓰기 규범이라는 근대 언어학의 전제
 우리는 단 한마디 말만으로도 그 발화자의 성별이나 연령대는 물론이고 그의 출신 지역이나 심지어는 계층이나 학력 수준까지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언어적 변이를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하지만 문어(文語)의 영역에 진입하는 순간 그러한 모든 변이는 말끔히 사라지고 단 하나의 변종,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변종이라는 것도 망각된 그리하여 ‘중립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그러한 변종, 즉 표준어가 전일하게 지배하는 균질적 단일언어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 책은 바람직한 문장에 대한 전범이나 올바른 글쓰기 규범을 마련하는 것이 근대언어학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사실 온갖 변이로 뒤덮인 현실 언어 그 자체는 도저히 ‘랑그’가 될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발화된 무수한 ‘빠롤’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단일한 언어로서의 ‘랑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언문일치가 이루어졌다는 근대적 문어에서뿐이다. 
‘순수’ 언어학이 대상으로 삼는 것 역시 도처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변이가 아니라 문어의 세계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균질적인 단일 언어인 것이다. 물론 이때의 문어는 국가를 단위로 하는 규범이 전 지역과 계층에 균질적으로 적용된 것이며 결정적으로 언문일치라는 (가상의) 필터를 통과한 것이어야 했다. 요컨대 언어학이 아니라 글쓰기 규범이 먼저라는 것이다. 이 책의 1부에서 문장 작법을 포함한 글쓰기 규범에 대한 논의를 다룬 것은 그런 맥락에서이다. 

언어적 근대의 극복이라는 문제
 이 책의 2부는 근대 한국어학이 성립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글들을 주로 묶었다. 물론 그것은 근대 언어학 일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하며 또 언어적 근대의 모순이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검토한 글들이기도 하다. 
근대의 문제란 우선 소수어 배제의 상황이다. 이는 현재에도 비표준어로의 공적 글쓰기가 공식적으로 배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드러나는 것이지만(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대상으로 한다) 남북 통일 상황을 가정하면 그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남북의 평화 공존이라는 이상은, 어느 하나를 표준형으로 선택해야 하는 언어적 근대의 상식, 혹은 폭력에 설 곳이 없어진다. 언어학에서의 남북연합 혹은 연방제와 같은 모델이 필요한 이유이다.
또 다른 하나의 고려 대상은 근대의 의사소통 개념이 등가교환을 모델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모델에서는 정보 교환이 의소소통의 전부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우애를 쌓고 연대를 확인하기도 하며 때론 긴장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사회가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등가교환의 의사소통 모델에서 사회는 먼저 미리 주어져 있어야만 하고 의사소통 과정에서 형성되는 여러 감정이나 긴장 관계 등은 매우 예외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언어적 근대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의사소통 모델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입장이다. 아직은 시론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제안하는 것은 새로운 의사소통 모델의 구상에서 증여와 답례의 교환양식을 참조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의사소통을 정보의 교환만이 아니라 관계의 형성 및 유지라는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고, 사회라는 것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언어학적으로 되돌아보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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