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국가들이 근대화 과정을 추진해나가면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전통적 개념이 근대적 가치에 따라 전복되는 것이었다. 『번역과 동아시아의 근대』에서는 그러한 과정을 거쳤던 개인과 사회·자유·정치와 경제·법·국민과 민족 등의 용어를 살폈다. ‘개인’이라는 용어는 동아시아의 전통에서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생소했다. 개인은 자연법적 인권을 가진 개체로서의, 이미 근대적 가치를 지닌 용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같은 개념의 개인이라는 용어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19세기, 동아시아에서는 20세기가 되어서야 사용되었다. 한편 동아시아 국가에서 종교나 지역 공동체를 의미하는 ‘사회’가 공동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연대라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19세기 말이다. ‘자유’는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종종 방종과 같은 의미로 인식되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개인의 핵심 가치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사용될 수는 없었다. 전통을 고수하려는 생각과 근대적 가치를 도입하려는 생각 사이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다. 자유가 군신관계 등 인륜적 관계로 유지되어온 동아시아 사회의 균열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자유라는 용어는 일반화된다. 결국 용어는 시대적 산물이다. 문명이라는 개념의 전변을 통하여 근대적 국민을 형성한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근대화를 조만간 불가피하게 추구해야 할 가치로 인식했다. 그리고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번역어가 겪은 우여곡절은 전통과 근대의 대립항이 빚어내는 모든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