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도구가 책을 만든다 

DTP(Desktop Publishing)가 도입된 뒤로 문서 한 장, 나아가 책 한 권을 만드는 과정은 과거보다 훨씬 빠르고 편해졌다. 지은이가 쓴 원고에 맞게 활자판에서 활자를 하나하나 꺼내 가지런히 맞추는 일은 워드 프로세서가, 그 활자를 수동 인쇄기에 올려놓고 잉크를 칠한 뒤 손잡이를 돌려 지면으로 옮기는 일은 프린터가 대체했다. 그렇다면 과거에 문서 한 장, 책 한 권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지은이 김진섭은 17년 전 충무로 골목 한 구석, 폐업을 준비하던 책 제작소에서 책 만드는 도구를 처음 접한 뒤 지금까지 전국의 책 만드는 현장을 오가며 갖가지 도구를 모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책을 만들어온 이로써 선배들의 흔적을 간직한 도구들이 쓸모없는 물건으로 취급되거나 버려지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의무로 시작한 일은 이제 생활이 되었다. 

“도구의 매력에 빠진 것은 여러 잡지를 만들면서부터였다. 그래서인지 특히 책 만드는 도구에 관심이 많았다. 책을 만들 때는 사람이나 기계는 물론이고, 크기는 작아도 없으면 안 될 도구도 필요하다. 숫하게 유럽을 오가며 많은 도구를 봤지만, 그저 멋지다는 느낌 외에 ‘내 것’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비로소 ‘내 것’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우리 선배들이 사용한 손때 묻은 도구들을 본 뒤였다.” 

이 책 『BOOK TOOLS』에는 지은이가 모아온 도구 가운데 책과 관련 있는 것 서른세 종류가 실려 있다. 298가지, 개수만 봐도 적지 않다. 도구들은 유명 브랜드에서 출시한 명품이거나 이름난 장인이 만든 것이 아니다. 외국 것에 비해 튼튼하지도 않고, 디자인도 매끄럽지 못하다.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작업자가 쓰기 편하게 고치거나 마구잡이로 만든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쓸모없어 보일지 모르는 도구일지라도 그것이 한데 모였을 때 내뿜는 힘은 실로 대단하다. 도구를 여러 각도에서 포착한 사진은 손때 묻은 손잡이, 엉겨 붙어 굳은 잉크 자국 등으로 도구가 간직한 저마다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일반적인 단행본으로서는 작은 A6 판형, 1,216쪽이라는 분량은 대부분 도구 사진이 차지한다. 중간중간 도구를 설명하는 짧은 글이 실리고, 분류를 위해 각 도구에는 책을 만드는 과정(일반, 인쇄, 제본, 후가공)을 뜻하는 알파벳과 숫자로 이뤄진 코드가 매겨져 있다. 때로는 익숙한, 때로는 낯선 도구 사진으로 가득한 이 책을 덮은 뒤 독자는 주위의 그동안 눈길이 닿지 않던 작고 낮은 곳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이 ‘읽는 것’이기 이전에 누군가 만든 ‘물건’임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예스24 제공]